매년 최고점에만 산 사람 vs 최저점에만 산 사람, 20년 뒤 차이는 얼마였을까
얼마 전 영상 구독 서비스 하나를 해지하려고 설정 화면까지 들어갔다가, 손가락이 멈췄습니다. 이 회사 이번 분기 구독자 수가 줄면 주가가 빠질 텐데. 저는 그 회사 주주가 아닙니다. 그런데도 해지 버튼 앞에서 남의 회사 실적을 걱정하고 있더군요. 결국 해지는 했습니다만, 그날 저는 제가 어딘가 이상해졌다는 걸 인정했습니다.
투자를 시작하고 몇 년, 시장을 보는 눈이 달라진 건 예상했던 일입니다. 예상 못 했던 건 소비가 달라졌다는 겁니다. 오늘은 그 이상한 증상들을 고백해 보려 합니다.
마트에 가면 예전엔 가격표를 봤는데 지금은 회사가 보입니다. 라면을 집으면 그 회사의 해외 매출 비중이 떠오르고, 화장품 코너를 지나면 요즘 이 브랜드 검색량이 늘었던가를 생각합니다. 마케팅 분석가라는 직업병에 투자자라는 직업병이 겹친 결과인데, 장 보는 시간이 두 배로 늘었습니다. 좋게 말하면 리서치이고 솔직히 말하면 병입니다.
재미있는 발견도 있었습니다. 어느 날 계산대 줄에서 앞사람들의 카트를 훔쳐보다가, 특정 브랜드의 제품이 유난히 많이 실려 있는 걸 봤습니다. 집에 와서 찾아보니 그 회사가 실제로 그 분기에 좋은 실적을 냈더군요. 생활 속에서 먼저 보이는 신호가 있다는 걸, 계산대에서 배웠습니다.
제가 주식을 들고 있는 회사의 제품 앞에서 이상한 마음이 듭니다. 경쟁사 제품이 더 싸고 좋아 보여도 손이 잘 안 갑니다. 내 돈으로 경쟁사 매출을 올려주는 게 배신 같달까요. 반대로 첫 배당금을 준 그 회사 제품이 계산대를 지나갈 때는 묘하게 뿌듯합니다. 이 매출의 아주 작은 조각이 돌고 돌아 다음 분기 제 계좌로 온다는 걸 아니까요.
그런데 이 충성심에는 함정이 있었습니다. 주주로서의 애착이 소비자로서의 판단을 흐리기 시작하면, 저는 더 좋은 제품을 놓치고 그 회사는 제 냉정한 피드백을 잃습니다. 회사에서 고객 데이터를 볼 때 제일 경계하는 게 내 취향이 데이터를 대신하는 순간인데, 마트에서 제가 그 실수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.
가장 비싼 수업료를 낸 증상입니다. 몇 년째 애용하던 브랜드가 있었습니다. 제품이 좋았고, 주변에서도 다들 썼고, 매장은 늘 붐볐죠. 이 정도면 주식도 좋겠지, 하고 샀습니다. 사기 전에 이유를 적어두라는 원칙을 지키긴 했는데, 적어둔 이유가 "내가 좋아하니까"의 정중한 버전이었습니다.
결과는 손실이었습니다. 산 뒤로 매장에 갈 때마다 손님 수를 세는 버릇이 생겼는데, 손님은 늘 많았습니다. 그런데 실적 발표를 열어보면 이익은 계속 줄었죠. 나중에야 알았습니다. 매장이 붐볐던 이유가 잦은 할인 행사였고, 그 할인이 이익률을 갉아먹고 있었다는 걸. 제품이 좋은 것과 회사가 돈을 잘 버는 것은 다른 문제였고, 매장이 붐비는 것과 이익률이 좋은 것도 다른 문제였습니다. 무엇보다 제가 좋아한다는 사실은 이미 주가에 다 반영되어 있었습니다. 저 같은 팬이 많아서 비싸게 거래되는 주식이었던 거죠. 좋아하는 제품은 리서치의 출발점일 수는 있어도 결론일 수는 없다는 것, 그 뒤로 저는 소비자로서의 감탄과 투자자로서의 계산을 따로 적습니다.
커피값 아껴서 투자하라는 말이 있죠. 저는 그 말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. 커피 한 잔의 행복을 수십 년 뒤의 복리와 맞바꾸라는 건 너무 각박하니까요. 다만 투자를 하고 나서 달라진 게 있습니다. 커피를 덜 마시게 된 게 아니라 커피를 마시면서 이 카페의 회전율과 임대료를 생각하게 됐습니다. 소비가 줄어든 게 아니라 소비가 관찰이 됐습니다. 그리고 관찰이 붙은 소비는 이상하게 덜 충동적입니다. 이 물건이 내 돈을 어디로 보내는지 아는 순간, 사고 싶은 마음이 한 번은 멈추거든요.
이 증상들을 다 겪고 나서 제가 찾은 균형은 이렇습니다. 소비할 때는 소비자로, 투자할 때는 투자자로. 마트에서는 더 좋은 제품을 고르고, 계좌에서는 더 좋은 회사를 고른다. 둘이 같은 회사면 좋겠지만 아닌 경우가 훨씬 많고, 그 둘을 섞으면 제품도 잘못 고르고 주식도 잘못 고릅니다.
다만 소비자로 살면서 얻는 관찰은 버리지 않습니다. 계산대의 카트, 갑자기 붐비는 매장, 주변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브랜드. 이런 것들은 리서치의 훌륭한 첫 단서입니다. 요즘은 투자 일지 한쪽에 생활 단서라는 칸을 따로 두고 이런 관찰을 적어둡니다. 어느 브랜드가 갑자기 눈에 띄거나 어떤 매장이 줄어들었다 같은 메모인데 몇 달 뒤 실적 뉴스와 대조해 보면 맞은 것도 틀린 것도 있어서 그 자체로 좋은 공부가 됩니다. 첫 단서로 시작해 재무제표로 끝내는 것이 소비자가 투자자로 넘어가는 올바른 순서였습니다.
여러분은 요즘 어떤 물건 앞에서 이상해지시나요. 그 이상함이 투자 공부의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. 다만 거기서 끝내지만 않으시면 됩니다.
투자 공부를 하면서 생활 속에서도 다양한 사고와 관점으로 브랜드를 바라보고 식별하는 것도 즐거운 경험일 수 있으니 여러분도 소비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투자 공부로 연결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.
이 글은 개인의 경험을 나눈 것으로, 특정 종목이나 브랜드의 권유가 아닙니다. 모든 투자의 판단과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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